가와데쇼보신샤 편집부에서 '긴급간행'했다는 <사상으로서의 3.11>은 서점 가판대에서 처음 발견했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지만 3.11 같은 사건을 '사상으로서' 읽는다는 말 자체에는 그다지 동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망설이다 이 책을 산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나 또한 3.11 이후의 열도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실제적인 조언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즐비한 사상가들이 '사상으로서의 3.11'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는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일단, 대충 화려한 필자진이 돋보이는 목차를 보면 이렇다.
사사키 아타루. 산산히 부서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쓰루미 슌스케. 일본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지금 떠오르는 것
요시모토 다카아키. 이제부터 인류는 위태위태한 다리를 터벅터벅 건너가게 되리
나카이 히사오. 전쟁에서, 고베에서
기다 겐. 기술은 이제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나?
야마오리 데쓰오. 두 가지 신화와 무상無常 전략
가토 노리히로. 미래의 기습
다지마 마사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모리 이치로.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
다테이와 신야. 생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일은 있고 가끔씩은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다
고이즈미 요시유키. 사건의 시간 -자본주의+전력+선의의 내셔널리즘에 대해
히가키 다쓰야. 자연은 난폭한 게 당연하다
이케다 유이치. 우리들 '후쿠시마' 국민 -3.11 이후를 살기 위한 아지테이션
도모쓰네 쓰토무. 노동=생의 경계에 즈음하여 -3.11을 둘러싼 비망록
에가와 다카오. 중간휴지와 취약함의 규모 -천재와 인재의 궁극적 융합에 관해
고소 이와사부로. 3.11 이후의 지구적 아나키즘
히로세 준. 원전에서 봉기로
<반란의 조짐> 번역위원회. 반 원자력의 증표
첫 장부터 사사키 아타루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내가 처음에 이 책을 보았을 때 수상쩍음을 느꼈던 것도 유사한 이유 때문이었다-바로 몇 명의 (사상)비평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 숫자에 과대한 의미부여를 하고 과거와 미래, 전과 후의 시대를 나누면서 펼쳐지는 비평 게임에 대한 다가올 피로감 같은. 어쨌든 책 전체를 읽은 후의 느낌을 말하자면, 이 일을 꺼리로 기발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비평적 욕구보다는 스스로가 생각해왔던 것들을 기반으로 어떻게 해서든 이 사건을 사상의 말로서 해석해보려는 시도의 부분부분이 모여있다는 인상이 더 크다. 사상이라는 말처럼 모든 장이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기술되지만, 크게 보면 유사한 입장에 속해 있을지 몰라도 서로서로의 시각이 조금씩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배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따라서 지적인 과시가 거슬리는 글이 있을 뿐 아니라 별로 동의할 수 없는 글도 있고, 순전히 읽는 재미가 있는 글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글도 있다.
3.11과는 관계없는 부분에서 읽는 재미가 있었던 것은 독특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다테이와 신야의 위의 글. 재해 이후의 상황과 관련해서 보편적인 윤리의 문제를 굳이 논의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은 이케다 유이치의 '우리들 '후쿠시마' 국민' 같은 글. 당사자도 아니면서 지나치게 동요하지 말라, 우리는 어차피 피해자가 아니라 제3자다 같은 논지도 어딘가에는 있었던 반면, 이케다 유이치는 이 글에서 '국민'이라는 말로 희생과 자숙을 유도하는 분위기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미래를 향한 실제적인 조언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이 인용된 사상가가 들뢰즈라는 점도 재미있다면 재미있는데, 개중에는 일본의 사회운동과 관련된 관점도 존재한다. 들뢰즈를 인용하여 관리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문제의 해결인 혁명이 아니라 (즉 불안정에서 안정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문제를 문제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 봉기의 가능성을 고엔지의 원전 반대 데모에서 읽어내는 히로세 준 같은 관점. 뒤이은 <반란의 조짐> 번역위원회의 글에서도 유사한 관점이 이어지는데, 히로세 준의 분석이 구체적인 만큼 알기 쉽고 설득력이 없지는 않지만 사실 이 책의 2쇄가 출간된 7월 30일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이런 변화에 대한 기대는 사실상 현실적으로 좌절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지금의 내 느낌이다(그러나 간사이라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을까?). 그러니, 고소 이와사부로의 후쿠시마에서 기구/장치(apparatus)의 자기붕괴가 드러난 만큼 "금후 세계의 혁명적 지성은 일본의 다가올 투쟁을 분석하고 그것을 배워야만 하리라." 운운의 말은 더더욱 실감에서 벗어나 있을 수밖에. 이 책 다른 곳 어딘가에는 부흥이나 국가의 재건이라는 부분에서 3.11에 미래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담는 것을 비판하는 글이 있었는데, 정반대되는 입장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물론 전자에 대해서는 비판이 필요한 분위기가 실제로 만연하고 있고, 일본 사회 자체의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싶은 마음은 또 존재한다는 점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싶다).
河出書房新社編集部編『思想としての3.11』河出書房新社、206頁、1600円
일단, 대충 화려한 필자진이 돋보이는 목차를 보면 이렇다.
사사키 아타루. 산산히 부서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쓰루미 슌스케. 일본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지금 떠오르는 것
요시모토 다카아키. 이제부터 인류는 위태위태한 다리를 터벅터벅 건너가게 되리
나카이 히사오. 전쟁에서, 고베에서
기다 겐. 기술은 이제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나?
야마오리 데쓰오. 두 가지 신화와 무상無常 전략
가토 노리히로. 미래의 기습
다지마 마사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모리 이치로.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
다테이와 신야. 생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일은 있고 가끔씩은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다
고이즈미 요시유키. 사건의 시간 -자본주의+전력+선의의 내셔널리즘에 대해
히가키 다쓰야. 자연은 난폭한 게 당연하다
이케다 유이치. 우리들 '후쿠시마' 국민 -3.11 이후를 살기 위한 아지테이션
도모쓰네 쓰토무. 노동=생의 경계에 즈음하여 -3.11을 둘러싼 비망록
에가와 다카오. 중간휴지와 취약함의 규모 -천재와 인재의 궁극적 융합에 관해
고소 이와사부로. 3.11 이후의 지구적 아나키즘
히로세 준. 원전에서 봉기로
<반란의 조짐> 번역위원회. 반 원자력의 증표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한다" "가능하다면 기발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같은, 잘 생각해보면 아무런 근거도 없는 압력은 이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우리는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가장 비참한 처지에 처한 사람들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꺼리'로 '이용'해서 이야기하라는 강요를 받고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 예를 들어 이 지진을 소재로 한 소설이 속속 출판된다거나 '9.11에서 3.11로' 같은 타이틀로 사상. 비평 게임이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자, 축제다. 일대 이벤트, 게임이 시작되었다. 제목은 대지진과 원전 사고다. 자, 머리가 가장 좋은 사람은 누굴까?"
첫 장부터 사사키 아타루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내가 처음에 이 책을 보았을 때 수상쩍음을 느꼈던 것도 유사한 이유 때문이었다-바로 몇 명의 (사상)비평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 숫자에 과대한 의미부여를 하고 과거와 미래, 전과 후의 시대를 나누면서 펼쳐지는 비평 게임에 대한 다가올 피로감 같은. 어쨌든 책 전체를 읽은 후의 느낌을 말하자면, 이 일을 꺼리로 기발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비평적 욕구보다는 스스로가 생각해왔던 것들을 기반으로 어떻게 해서든 이 사건을 사상의 말로서 해석해보려는 시도의 부분부분이 모여있다는 인상이 더 크다. 사상이라는 말처럼 모든 장이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기술되지만, 크게 보면 유사한 입장에 속해 있을지 몰라도 서로서로의 시각이 조금씩 다르고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배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따라서 지적인 과시가 거슬리는 글이 있을 뿐 아니라 별로 동의할 수 없는 글도 있고, 순전히 읽는 재미가 있는 글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글도 있다.
우선 내셔널리즘, 또 인간(관계)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물론 전적으로 정의하기에 달려 있지만 자기 혼자가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타인(들)도 중요하게 여기자는 계기를 포함하고 있고, 이것이 좋은 일이라면 이런 한도 내에서 그렇다. 나아가 그런 마음을 갖는 이유는 가깝고 같은 것에 대한 동정이나 공감에서 나온다는 면이 있다. 이는 지원하고 원조하는 이유 자체와 그대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즉 그 농담, 우선도를 말한다. 이 입장을 A1이라고 하자. 반면 기본적으로는 농담이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보편주의'의 입장은 A2라 하자. (중략) 확실히 나(우리)의 행동은 나(우리)의 심성으로부터 나온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번 경우에는 비참함의) 가까움이나 강함이 예컨대 때때로 많은 모금을 획득하는 등의 결과를 가져올 때는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까운 관계로부터 심성A를 스스로에게 확실한 것으로서 획득한다고들 하는데, 여기에도 아마 옳은 부분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기를 거쳐 -그럴지도 모른다고 역시 나에게는 보류하고 싶은 구석이 있는데- 획득된 가치. 심성 A를 인칭. 관계와 별개로 두고 싶다고 그 사람들 자신이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3.11과는 관계없는 부분에서 읽는 재미가 있었던 것은 독특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다테이와 신야의 위의 글. 재해 이후의 상황과 관련해서 보편적인 윤리의 문제를 굳이 논의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은 이케다 유이치의 '우리들 '후쿠시마' 국민' 같은 글. 당사자도 아니면서 지나치게 동요하지 말라, 우리는 어차피 피해자가 아니라 제3자다 같은 논지도 어딘가에는 있었던 반면, 이케다 유이치는 이 글에서 '국민'이라는 말로 희생과 자숙을 유도하는 분위기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미래를 향한 실제적인 조언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원전 반대뿐만이 아닌 계몽에 의한 활동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스스로의 거만함에 움츠러들어 현재 상황 앞에서는 무력하다고 선언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성실함을 어필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이러한 몸짓과는 정반대되는 뻔뻔함이다. 즉, 위험한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 위험한 지역에 사는 사람, 그들의 '스테이트'는 그 위험한 작업이나 위험한 지역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 호소하는 이 우리 또한 그들의 '스테이트'인 것이다. 이렇게 단언하고 쓸데없는 참견으로 그들의 인생에 개입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니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런 뻔뻔함이다. / 이런 방침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보기 위해 가령 수도권에 사는 사람은 일본국민임을 그만두고 '후쿠시마국'의 일원이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중략) 원자력 반대를 외치는 우리가 지금 동일화해야 하는 것은 바로 '후쿠시마'의 당사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이 건의 당사자기 때문에. 우리는 이 건에 관해 말하자면 '가족'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아나크로니즘인 것이다.
후쿠시마 국민인 우리는 이미 확률론적인 세계에 던져져 있다. 모든 확률에 있어 건전한 세계 같은 것은 픽션에 불과함을 이미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웅적인 태도란 아낌없이 유쾌하고 충실한 인생을 가능한 한 길게 계속 살기를 목표로 삼는 것이다. 자기희생이나 자숙의 태도는 오히려 확률론적 상황으로부터의 도피다. 치킨레이스는 확률의 세계에 대한 흔해빠진 부인인 것이다. 피폭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위험한 지역에서 벗어난다. 우리 후쿠시마 국민이 택해야 하는 논리는 이런 에고이즘인 것이다.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이 인용된 사상가가 들뢰즈라는 점도 재미있다면 재미있는데, 개중에는 일본의 사회운동과 관련된 관점도 존재한다. 들뢰즈를 인용하여 관리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문제의 해결인 혁명이 아니라 (즉 불안정에서 안정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준안정에서 준안정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문제를 문제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 봉기의 가능성을 고엔지의 원전 반대 데모에서 읽어내는 히로세 준 같은 관점. 뒤이은 <반란의 조짐> 번역위원회의 글에서도 유사한 관점이 이어지는데, 히로세 준의 분석이 구체적인 만큼 알기 쉽고 설득력이 없지는 않지만 사실 이 책의 2쇄가 출간된 7월 30일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이런 변화에 대한 기대는 사실상 현실적으로 좌절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지금의 내 느낌이다(그러나 간사이라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을까?). 그러니, 고소 이와사부로의 후쿠시마에서 기구/장치(apparatus)의 자기붕괴가 드러난 만큼 "금후 세계의 혁명적 지성은 일본의 다가올 투쟁을 분석하고 그것을 배워야만 하리라." 운운의 말은 더더욱 실감에서 벗어나 있을 수밖에. 이 책 다른 곳 어딘가에는 부흥이나 국가의 재건이라는 부분에서 3.11에 미래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담는 것을 비판하는 글이 있었는데, 정반대되는 입장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물론 전자에 대해서는 비판이 필요한 분위기가 실제로 만연하고 있고, 일본 사회 자체의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싶은 마음은 또 존재한다는 점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싶다).
河出書房新社編集部編『思想としての3.11』河出書房新社、206頁、1600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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