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시마 유, 유코의 지름길

아까 아사코씨의 입에서 나왔을 때 콘실러라는 단어가 눈밑의 기미를 숨기는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쩐지 마츠모토 레이지의 SF만화에 나오는 우주인 미녀처럼 들렸다(내 이름은 콘실러). 그렇게 말해봤더니
"그런가~" 미즈에씨는 이상한 얼굴을 했다. 작은 상자를 열고 컴팩트를 하나 꺼낸다.
"그럼 아이섀도우는?" 그건 악의 군단이라는 느낌이군요(아이섀도우 네 이 녀석). 순간적으로 대답했지만 "그럼" 하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른 편평한 것을 꺼냈다.
"그럼 파운데이션은?" 왠지 미즈에씨는 정색을 하고 있다. 파운데이션은 그렇지, 물체를 해석하기 위한 광선같은 것 아닙니까(파운데이션을 좀더 강하게 대어 봐).
"겔랑은?" 괴수다(겔랑의 꼬리를 노려라!). 
"소피나는?" 미모의 승무원(그렇게 걱정스러운 얼굴 하지 마라, 소피나).
"맥스팩터가 우주선이구나." 화난 듯도 하고 웃는 듯도 한 목소리로 미즈에씨도 오징어를 뜯어먹는다. 너댓 개 늘어선 화장품을 순서대로 돌려놓는다. 탁 하고 뚜껑을 덮고 일 해야 되는데, 했다. 평소에는 오백 밀리리터인 맥주 캔이 오늘은 작다 싶었더니 그래서였나.


제1회 오에 켄자부로상(오에 켄자부로 본인이 1년간 출판된 문학작품들을 읽고 직접 선정하는)을 수상한 나가시마 유의 『유코짱의 지름길』은 골동품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그곳 이층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나'가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나가고 있는 연작단편소설들을 엮은 책이다. 첫 이야기 '미즈에씨의 원동기'의 주인공은 미즈에씨. 그녀는 골동품가게의 '물건을 사지 않는' 단골로서 자주 가게에 들르는데 어느날부터 '나'에게 이런저런 물건들을 가지고 온다. 추운 겨울 밤 그녀는 가게 앞 횡단보도를 건너서 '나'에게 줄 스토브를 가지고 온다. '유코짱의 지름길'에서는 '나'가 본점에 가는 전차 안에서 야간반 고등학교를 다니는 유코짱을 만난다. 그녀는 골동품가게가 세 들어 있는 집 주인의 둘째 손녀인데, 코미케에서 코스프레를 하고 고등학교의 선생님과 사귀고 있다는 비밀을 털어놓는다. 돌아갈 때 또 플랫폼에서 유코짱을 만난 '나'는 여지껏 한번도 간 적이 없는 '지름길'을 거쳐 골동품가게로 돌아오게 된다. '미키오씨의 전 애인'에서는 프랑스인인 프랑소와즈가 등장해서, 골동품가게 주인인 미키오씨가 결혼하기 전에 미즈에씨와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유코짱이 가르쳐준 지름길에서 미즈에씨의 집을 알게 된 이후 이따금 그녀의 집에 들러서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원동기를 타다가 사고가 나서 다쳤다는 미즈에씨에게 가보니 그녀는 프랑스와즈가 미키오씨의 전 애인이라고 한다. 추운 겨울인데도 주인집 첫째 손녀인 아사코씨는 늘 밖에 나와서 나무상자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대학의 졸업전에 내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전시회장에 가보니 온갖 크기의 나무상자들이 공간 한 가운데에 전시되어 있다. '프랑소와즈의 프랑스'에서는 프랑소와즈가 자신의 프랑스 집에 있는 물건을 와서 보고 사가라고 미키오씨에게 제의한다. 그리고 유코짱이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집주인은 기절하고 만다. '나의 얼굴'에서는 '나'가 자신이 사는 골동품가게 이층을 결혼하기로 한 유우코짱에게 내주고 새벽에 몰래 그곳을 떠난다. 

장황하게 줄거리를 요약해봤지만, 아마 이 소설만큼 거기에 걸맞지 않은 소설은 없을 것이다. 아사코씨는 자신의 작품인 상자들이 '거리'같아 보인다는 '나'의 말을 듣고 "뭔가로 보인다는 것은 이 전시가 실패"라는 이야기라면서 실망스러워 한다. 미즈에는 '나'나 골동품가게의 점장이 매일 아침마다 아사코가 상자를 만드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 곧 작품이 아니냐고 해석한다. "그러니까 상자를 계속해서 만드는 모습" "작업의 연속을 계속해서 본" '나'와 점장이 바로 아사코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일화를 나가시마 유의 평소 창작태도와 연결해서 해석해버리면 그야말로 작자가 가장 싫어하는 '뭔가로 보이는' 것이 되어버릴지도 모르지만, 크고 작은 상자를 계속해서 만드는 것을 보고 있듯이 '나'를 둘러싼 이런저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씌어지는 것을 읽고 있다는 그 행위 자체가 이 소설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무색투명한 존재이고 마지막까지 이름과 연령이 정확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의 관계는 골동품가게 플라코코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이어져있는 것 같으면서도 각자가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나같이 외로움을 잘 타고 정에 약한(...!) 사람에게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메마름인데, 쓰러진 집주인을 병원에 싣고 간다든지 유코의 결혼을 같이 축하한다든지 함께 스모를 보러 간다든지 심지어 다같이 파리에 있을 때조차도 이들은 각자가 무지막지하게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주는 개별적인 존재들이다. 소설의 배경이 겨울이고 골동품가게의 이층은 난방도 잘 안 되기 때문에, 그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이 '나'의 작고 일상적인 행동들을 보고 있는 게 어쩐지 추웠다. 오노 나츠메의 『다섯 번째 방』(11월에 나온단다)을 읽으면서도 생성되고 변화하는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당연하게 맺어질만한 것이 아닌 장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라는 것을 한번 천천히 정리해보고 싶다.

엊그제부터 오사카도 기온이 뚝 떨어졌다. 월동준비한답시고 따뜻한 침대시트도 사고, 실내에서 걸치는 따뜻한 웃옷도 사고, 귤도 잔뜩 사놓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게 코타츠 안에 있어도 손이 시리다. 문득 얼굴을 만지려다 그 차가움에 깜짝 놀라는 이런 계절이라서 그런지 읽은지 일주일이 지난 『유코짱의 지름길』은 어쩐지 추운 느낌으로 남아버린 것 같지만, 이 소설은 그것을 읽는 과정으로서 참 괜찮았다. 골동품가게 점장 미키오씨는 어느 날 노트북 컴퓨터를 금색으로 칠해 놓는다. 그는 아마 컴퓨터를 바보로 생각하는지, "어플리케이션 에러가 발생했습니다-?" "인스톨 CD를 넣어주세요-?" 하고 화면에 나오는 말을 어미를 올려서 읽는다. 유코짱이 새벽까지 문을 연다는 서점은 '나'가 볼 때는 늘 셔터가 내려져 있는데, 골동품가게를 떠날 때 그곳의 셔터가 내려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또... 아, 역시 소설은 줄거리나 주제가 아니라 읽는 그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이 번역되어서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by loki | 2007/11/21 00:29 | 편중된 독서취향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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