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21일
버틀러의 '윤리적 폭력에 대항하여'에 대한 메모
스타이런의 소설 『소피의 선택』을 읽으면서 내가 긴장감을 느꼈던 부분들 중에는 네이선과 스팅고가 술집에서 빌보의 죽음에 건배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 논쟁하는 장면도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도 축배를 들지는 않겠다는 스팅고의 말에 네이선은 히틀러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렇냐고 묻는다. 물론 스팅고는 빌보는 히틀러가 아니고 히틀러의 죽음에 대해서라면 기꺼이 축배를 들겠다고 대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리를 둘러싼 집단과 개인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집단이 폭력을 휘두를 때 거기에서 우리는 개인을 어느 정도로 구별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물론 중국의 전범 수용소에서 자신의 죄과를 후회하며 '천황이 나쁘다'라고 했다는 어떤 일본인 전범의 말에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천황에게는 천황이 책임져야 할 몫이 있지만 어쨌든 실제로 이러저러한 행동을 저지른 것은 그 개인 본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도 시스템의 문제가 갖는 중요성을 모르지 않으므로 나는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내가 소설에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K씨는 '단편화'가 갖는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원래 주디스 버틀러의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것』에 대한 논의에서 촉발된 이야기였기도 하고, 아마 그것은 완벽한 자기동일성을 가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일본어를 대강 중역해보면, "나 자신에 대한 나의 불투명성이 타자를 승인하는 능력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아마 우리들 자신에 관한 공유된, 변하지 않는, 부분적인 맹목에 근거한 윤리일 것이다. 사람은 이용가능한 언설 안에서 보여주는 자기 자신과 늘 같다고는 할 수 없다는 인식은, 결과적으로 타자들에 대한 일종의 인내-그것은 어떤 순간이든지 동일하고(self-same) 싶다는 그의 요구를 유예시킨다-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자기동일성에 대한, 더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일관성에 대한 요구를 유예시키는 것은 어떤 종류의 윤리적 폭력을 저지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윤리적 폭력은 우리가 자기동일성을 끊임없이 명시하고 유지할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을 요구한다. 이는 불가피하게 시간의 지평 안에서 살고있는 주체로서는 충족시키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언정- 힘든 규범이다"라고 2장 '윤리적 폭력에 대항하여'의 도입부에서 버틀러가 쓰고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바로 뒤에 이어지는 '판단의 한계'와 같이 생각할 때 버틀러의 논의에 대한 가장 단순한 해석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되리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어쨌든 타자에게 완벽한 자기동일성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예를 들면 히틀러에 대해서조차) 윤리적 폭력에서 비껴나려고 할 때 거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어떤 사람은 실제로 무기를 들고 우리에게 달려들지도 모른다.
버틀러가 주장하는 윤리-도덕적 판단과는 다르다-를 나이브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인간은 서로에 대한 '부름'에 의거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윤리가 실제로 가질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역시 고민하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어떠한 윤리가 되었든 그것은 이미 그 윤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동일성에 대한 부정과 '내 안에 너 있다'처럼 나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성을 생각하면, 확실히 선생님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프로이트와 비유럽인』을 예시로 든 것은 적절했다.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는 것은 유대교의 기원을 따라올라가도 거기서 우리는 '타자'와 만난다는 이야기가 되고, 타자의 존재를 내부에 포함하고 있지 않은 단 하나의 통합된 아이덴티티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이드가 하고자 하는 것처럼 고정된 아이덴티티에서 쉽게 벗어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아이덴티티의 기원에 존재하는 이러한 결함은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려는 폭력으로 나타나지는 않는가라고 묻는 재클린 로즈의 코멘트가 어쩐지 나에게는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윤리에 기반한 관계를 누군가가 추구할 때, 그 윤리에 찬성하는 사람조차도 '누군가'는 그 윤리에 결코 동의하지 않으리라고 (경험에 비추어-맥락은 다르지만 로즈 또한 발칸에서의 역사적 경험을 상기시키지 않는가) 의심하기 때문에 그것은 더더욱 힘을 잃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현실정치의 논리'를 앞세워서 윤리에 대한 고민을 바보 취급하려는 사람들을 결코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일본어를 대강 중역해보면, "나 자신에 대한 나의 불투명성이 타자를 승인하는 능력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아마 우리들 자신에 관한 공유된, 변하지 않는, 부분적인 맹목에 근거한 윤리일 것이다. 사람은 이용가능한 언설 안에서 보여주는 자기 자신과 늘 같다고는 할 수 없다는 인식은, 결과적으로 타자들에 대한 일종의 인내-그것은 어떤 순간이든지 동일하고(self-same) 싶다는 그의 요구를 유예시킨다-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자기동일성에 대한, 더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일관성에 대한 요구를 유예시키는 것은 어떤 종류의 윤리적 폭력을 저지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윤리적 폭력은 우리가 자기동일성을 끊임없이 명시하고 유지할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을 요구한다. 이는 불가피하게 시간의 지평 안에서 살고있는 주체로서는 충족시키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언정- 힘든 규범이다"라고 2장 '윤리적 폭력에 대항하여'의 도입부에서 버틀러가 쓰고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바로 뒤에 이어지는 '판단의 한계'와 같이 생각할 때 버틀러의 논의에 대한 가장 단순한 해석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되리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어쨌든 타자에게 완벽한 자기동일성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예를 들면 히틀러에 대해서조차) 윤리적 폭력에서 비껴나려고 할 때 거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어떤 사람은 실제로 무기를 들고 우리에게 달려들지도 모른다.
버틀러가 주장하는 윤리-도덕적 판단과는 다르다-를 나이브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인간은 서로에 대한 '부름'에 의거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윤리가 실제로 가질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역시 고민하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어떠한 윤리가 되었든 그것은 이미 그 윤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동일성에 대한 부정과 '내 안에 너 있다'처럼 나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성을 생각하면, 확실히 선생님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프로이트와 비유럽인』을 예시로 든 것은 적절했다.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는 것은 유대교의 기원을 따라올라가도 거기서 우리는 '타자'와 만난다는 이야기가 되고, 타자의 존재를 내부에 포함하고 있지 않은 단 하나의 통합된 아이덴티티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이드가 하고자 하는 것처럼 고정된 아이덴티티에서 쉽게 벗어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아이덴티티의 기원에 존재하는 이러한 결함은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려는 폭력으로 나타나지는 않는가라고 묻는 재클린 로즈의 코멘트가 어쩐지 나에게는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윤리에 기반한 관계를 누군가가 추구할 때, 그 윤리에 찬성하는 사람조차도 '누군가'는 그 윤리에 결코 동의하지 않으리라고 (경험에 비추어-맥락은 다르지만 로즈 또한 발칸에서의 역사적 경험을 상기시키지 않는가) 의심하기 때문에 그것은 더더욱 힘을 잃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현실정치의 논리'를 앞세워서 윤리에 대한 고민을 바보 취급하려는 사람들을 결코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 by | 2009/06/21 22:30 | 튜즈데이 클럽 주변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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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서울에서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일본은 올 계획 없어?)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아마 내 표현력의 문제일 듯 싶어.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