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대낮

1. 겨우겨우 날씨가 갰다. 그제부터 열흘쯤 체재 예정으로 토쿄에 와 있는데, 방 주인이 회사에 간 사이에 담요를 세탁기에 돌렸더니 약 세 시간동안 세탁기가 다 부서지는 소리가 나더니 겨우 끝났다는 신호음이 들렸다. 그래도 세탁기 전자동 코스에 담요 코스가 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집에는 커다란 호랑이 담요가 있었는데, 사실 그 뒤로는 작은 무릎담요류를 제외하면 집에 담요라곤 없었다. 십몇년이 지나서 내가 담요로 회귀할지는 몰랐지만, 사실 나도 담요 두 장과 두터운 이불로 간신히 지난 겨울을 났다. 그러니까 이렇게 덥다고 해서 추운 겨울이 그리워지지는 않는다.

2. 아주 가끔 보는 헌팅하는 남자애들은 대개 "귀여워 보여서 친구가 되고 싶다" "그러니 같이 밥을 먹자"고 한다. 한밤중에 말을 거는 전문 직업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대체로 이쪽에서 머뭇머뭇하면서 거절하면 다소 미안해하면서 퇴장한다. 이게 어느 정도 정해진 문법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귀여워 보이니까 친구가 돼서 밥을 먹자는 단선적인 논리의 근거가 궁금할 때가 있다. 얼굴도 딱히 귀엽진 않지만 어떤 연유로 그쪽 타입을 자극했다 치더라도, 그렇다고 내가 친구 하기 좋은 성격일지 아닐지는 어떻게 알고. 아무튼 지난 주에 쿄토대 앞에서 나에게 말을 건 그런 부류의 아이들은 아마 각종 콤플렉스로 피곤해진 여자아이(;;;)를 위로하기 위해서 하늘이 보낸 선물일 것이다. 꼭 정말로 공부만 하는 학생처럼 보이는 수수한 행색도 실은 변신이고, 아지트로 돌아가면 오늘도 중차대한 임무를 무사히 달성했다며 일과표를 작성할지도.

3. 건너건너 아는 사람 중에 지방 출신에 성적이 아주 우수하며 집안도 매우 좋은데 사회운동에 열심인 학생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내 주위에서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머리 묶는 고무줄 하나도 에르메스가 아니면 안 사는 사람이 어떻게 빈곤층을 알겠냐는 식으로 그 진실성을 의심하곤 했는데, 아마 그건 식민주의에 반대한다면서도 집에는 비싼 '이조' 도자기가 있고 디즈니랜드를 좋아한다는 어떤 대학교수에 대한 지금 연구실 몇몇 사람들의 농담 섞인 반감과도 통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 생각으로는 역시 그 학생은 성실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회의 격차를 비판하고 그것을 막지 못하는 정책을 비판하고 많은 사람들의 무지를 비판하면서도, 사실 자신은 결코 소위 사회 하층에 속한 적도 없고 '진실성이 의심된다'는 말을 들으면서 사회활동에 끼어든 적도 없고 대체로 그냥 자기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사실 대학원에서 구르면서 부모님 직업이 대체로 소위 말하는 '사'자 돌림인 사람들을 보다 보면-변호사, 검사, 의사, 약사, 교사... 그러고 보니 목사도 있었다. 대학교수는 생각보다 더 많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끔 일종의 르상티망을 토로하는 시간이 기분 좋을 때도 있는데, 그래도 뭔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여기 앉아서 비판하기 보단 그냥 이따금 술 마시며 자조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게 나는 마음이 편하다.

4. 우연히 참여하게 된 연구회 덕분에 <호모 사케르>를 드디어 읽었다. 당일 연구회에서 아감벤은 많이도 욕을 먹었지만, 사실 나는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호모 사케르'든 '벌거벗은 생'이든 뭐가 됐든 소위 서양 이론을 현지 사회에 쉽사리 적용하는 학자들에 대해 다른 학자들이 가지는 뿌리깊은 반감이 어디든지 존재한다는 게 매우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책을 쓰면서 파견-비정규직은 이 시대의 호모 사케르들이다, 복지를 받지 못한 키타큐슈의 사례는 벌거벗을 생의 예다라는 이야기로만 끝난다면 재미는 없겠지만, 어떤 것들은 정말로 그런 개념들을 가지고 설명했을 때 딱 맞아떨어지는 게 있기도 한 걸 어떡하나. 그렇게 막 쓰일 수 있는 개념을 빚어냈다는 게 그런 각종 이론이 읽히는 이유이기도 할 텐데. 한편, 아감벤에 대한 요즘 학계의 선호를 프랑스 사상도 스타들이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이제 한물 갔고 지금은 이탈리아 사상의 시대가 온 것이라는 식으로 분석하는 것도,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참 따분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학부 때 프리모 레비를 읽고 싶어서 이탈리아어 공부를 잠시 시작했다가 접었는데, 그때 열심히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쯤 유행의 첨단을 갈 뻔 했을 리는 없을 거다 물론.

+5. 어느새 금요일 밤 열 시가 되었다.
멍하게 앉아있다가 뮤직 스테이션을 하고 있기에 채널을 돌려봤는데, 어머나. 동방신기가 나와있다. 언제부터 출연하기 시작한지는 모르겠는데, 자니즈 파워 때문에 출연을 못한다는 소문을 예전부터 들었지만 뜰만큼 뜨면 출연할 수 있다는 거구나. 옆에는 아라시도 나란히 앉아있어서 왠지 조금 재미있었다. 그보다, 엠스테에서 위클리 차트를 소개하는데 빅뱅이 7위여서 더 놀랐다. 언젠가 엠스테에 나와서 방방 날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 사실 동방신기도 파워풀한 댄스를 보여주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빅뱅의 소개가 일본의 EXILE인가? 썬글라스 때문인가...? 자주 느끼는데, 왜 한국의 모모, 일본의 모모 이런 이해의 구조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신데렐라 전설의 러시아 버전, 일본 버전, 뭐 이런 이야기도 아니고, 꼭 닮은 것을 찾아서 그것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사실 닮지도 않은 데다, 그것 말고 소개의 말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한국의 타케유치 유코는 누구인가요?" "명동은 토쿄로 보면 어떤 동네인가요?" 이런 질문이 얼마나 답하기 어려운데. 그런 게 정말 이해에 도움이 되기는 하나?

by loki | 2009/07/03 15:38 | 두서없는 잡담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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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turtle at 2009/07/03 17:13
으하핫, 저는 호모 사케르를 보자마자 '사케 마시기를 좋아하는 인간인가?' 하고 생각했지 뭐에요. 참고로 전 고구마 소주가...

전 한 번에 책을 여러 권 같이 읽는 못된 버릇이 있는데, 요샌 나보코프의 소설과 함께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번역본)을 읽고 있어요. 마침 읽고 있는 작가의 이름이 등장하면 맥락이 뭐가 됐든 무작정 반가운 마음이 드네요.
Commented by loki at 2009/07/03 21:59
아 만일 그렇다면 전 호모 사케르가 맞네요 헤헤. 전 소주는 우롱차를 타야 마실 수 있는데, 일본주는 잘 마셔요 빨리 가서 문제지만.
주기율표 어떠세요? 저도 이런 우연이 무척 반갑습니다. 요즘엔 저도 한 두세 권쯤 같이 읽어요. 아니 그보다 한 권 읽다가 던져두고 그냥 다른 책 본다고 해야 할지도...
Commented by turtle at 2009/07/04 23:50
전 일본주든 막걸리든 쌀로 만든 술은 마신 다음 두통이 너무 심해서 잘 못 마시겠어요.

'주기율표'는 무척 좋습니다. 은근한 유머가 있고요. 에프라임 키존 스타일의 살짝 자학적인 유머랄까요.
Commented by haigha at 2009/07/03 19:30
지난주만도 헌팅을 복수로 당하셨다는 거군요! 오오.
세탁기가 다 부서지는 소리는 저도 경험한 적 있는데, 수평이 맞지 않을 때 그럴 수 있다고 해요. 한번 그쪽을 살펴보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Commented by loki at 2009/07/03 22:00
아, 아니어요. 설마요!! 그냥 그런 종류의 애들이란 의미에서 복수로 썼을 뿐인데 흑흑.
방 주인이 돌아오면 세탁기 수평을 확인해봐야겠군요. 감사합니다. 소리가 워낙 요란해서 정말 세탁기가 그대로 분해되는지 알았어요.
Commented at 2009/07/03 23:5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loki at 2009/07/09 11:48
그렇군요! 저도 10일쯤엔 한국에 들어가는데, 그전에 혹시 방해가 안 된다면 꼭 만나주세요~~
제가 더 달라붙어서 귀찮으실지도 몰라요 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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