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는 조개가 되고 싶다'

『레이테 전기』나 『검은 비』 같은 일본의 전쟁문학에 대한 좌담을 모은 『전쟁은 어떻게 이야기되어 왔는가』를 읽다 보면, 전쟁에 대한 일본의 멘털리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문학자 카와무라 카나토, 역사학자 나리타 류이치, 사회언어학자 이연숙이 참가한 좌담회에서 히노 아시헤이의 유명한 군대 삼부작을 다뤘을 때 이연숙은 나머지 두 사람과는 다르게 이 작품을 해석하면서, 히노의 문학은 전쟁 그 자체와 직면하는 것을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 작품은 당시의 일본 문학작품이나 일본 사회가 전쟁을 어떻게 느꼈는가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이연숙은 "식민지측에서는 전쟁은 문제가 안 된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물론 피식민지인들이 다양한 형태로 전쟁에 동원되어 갔음을 생각하면 이 말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과 피식민지측의 기억에는 상당히 어긋난 부분이 있으며, 피식민지측의 경우 전쟁은 소위 15년전쟁 이전부터 이미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15년전쟁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바로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그 때문에 전전과 전후를 구분하는 데에도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마 그녀뿐만이 아닐 게다.   

츠보이 사카에의 『스물 네 개의 눈동자』를 처음 읽었을 때에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일본 제국으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은 피식민지인들뿐만이 아니었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다. 하지만 『스물 네 개의 눈동자』의 원작도 이를 영화화한 작품도 왜 이 전쟁이 일어났는가를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지적해줄 필요도 없을 만큼 잘 안다. 그것은 내가 공습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텔레비전 방송이나,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인터뷰에 응하는 '일반 시민'이 국가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무구한 사람들에 대한 추모를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언제나 느끼곤 하는 갑갑함과도 무관하지 않다. 취향으로서의 반전기분도 어떤 의미에서는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국민국가의 경계를 그대로 따라갈 뿐인 피해/가해의 이분법에도 반감을 갖지만, 그야말로 자연재해처럼 외부에서 들이닥친 전쟁과 거기에 휩쓸려 가는 선량하고 겁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여전히 뭔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있다. 게다가 이런 식의 언설들이 보여주는 전쟁에 대한 감각은 1930년대에도, 『스물 네 개의 눈동자』가 나왔던 시대에도, 그리고 그로부터 또다시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로 변하지 않은 것만 같다. 

작년 11월에 공개된 영화 <나는 조개가 되고 싶다>는 1958년에 처음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로서 방영되어 이듬해 영화로서도 상영된 유명한 작품이다. 작년에 공개된 영화에서는 나카이 마사히로와 나카마 유키에가 주연을 맡았을 뿐 아니라 개봉 전부터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과 관련된 영화로서는 아마도 가장 최근에 나온 작품이겠지만, 텔레비전 광고로 처음 이 영화에 대해서 알았을 때 나는 거부감을 심하게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은 예상과는 상당히 달랐다. 포로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B,C급 전범재판을 회부되어 사형 판결을 받은 주인공 시미즈 토요마츠는 실은 해외의 전장에 나가지도 않았고 하물며 포로를 살해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무구한 한 사람의 이발사이다. 그런 그가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는 이유는 동료(라곤 해도 실은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타키다가 상사인 니시자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옆에 서서 연거푸 뺨을 맞곤 하는 타키다를 모른척 하지 못하고, 훈련중에도 타키다를 구타하고 있는 니시자와에게 사소한 반향을 한 뒤로 타키다와 같은 처지에 처하게 된다. 포로를 처형할 병사를 고르라는 명령을 받은 니시자와는 당연하게도 시미즈와 타키다를 골라낸다. 물론 시미즈의 총검은 포로의 팔을 스쳤을 뿐이었지만, 이것이 문제가 되어 시미즈와 타키다를 포함한 관계자들은 전범으로 법정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지금까지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처음에 가난하지만 평온하게 생활하고 있는 시미즈 가족이나 그들을 둘러싼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데서부터도 알 수 있다. 징집된 마을사람을 밝게 배웅하는 한편으로 시미즈가 운영하는 이발소에 모여드는 마을사람들은 속칭 '빨간 종이'가 도착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도 하다. 시미즈의 아내인 후사에는 쌀밥이 먹고 싶다고 조르는 아들을 전장에 나가 있는 병사들은 도마뱀이나 풀까지 먹으면서 '애쓰고 있다'며 달래지만, 물론 그 병사가 무엇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지를 영화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족과의 단란한 식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시미즈는 군대에 끌려가게 되는데, 코치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전쟁은 그야말로 외부에서 침입해오는 무언가인 셈이다. 그리고 그 전쟁이 일상을 영위하고 있던 한 사람의 인간의 인생을 어떻게 파괴해가는지를 영화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재판은 영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피의자와 재판관 사이에는 통역이 필요하다. 떠올려 보면, 처음에는 포로를 향해 달려들 수 조차 없었던 시미즈가 그래도 포로에게 무기를 향할 수 있었던 것은 '상관의 명령은 천황의 명령'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판관은 시미즈가 천황에게 직접 명령을 받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Even coming from senior officer, if you thought this order was inappropriate you could have chosen a disobey but you did not, you, why not?"라고 힐문한다. 시미즈는 영어로 된 이 질문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지만, 통역이 질문을 일본어로 옮겨주어도 그 이해불가능한 감각은 계속해서 남아있다. 지금 국제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인 영어로 발화된 이 질문을 시미즈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보편적인 입장에서 제기되는 유사한 질문을 앞에 두고 선 사람들의 당혹스러움을 상징하고 있는 장면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말은 이중의 의미에서 통하지 않고, 시미즈를 비웃는 재판관의 물음이 사정을 도통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다. 명령 불복종을 따라다니는 폭력의 가능성을 짐작할 수조차 없는 그들은 명령의 직접적인 책임자인 상관들뿐만 아니라 직접 무기를 든 타키다와 시미즈에게도 사형을 선고한다. 그렇다, 이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일련의 행동의 진정한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지를 추궁하려고는 하지 않고, 문제가 되고 있는 전쟁의 내용 또한 여전히 애매한 채로 남아있다. 애당초 시미즈가 속해있는 부대는 실제로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전장에 나가지도 않았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리고 전쟁에 관한 물음과 답은 어정쩡하게 끝나버린 채 "손해를 보는 것은 언제나 말단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중얼거림으로 처리돼버린다. 이런 부조리를 "국민들은 알고 있을까?"라고 야노 중장은 화면 속에서 묻고 있는데, 이 영화의 바닥에 흐르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커다란 전쟁'과 거기에 희생된 무력한 개개인의 대립일 것이다. 거듭 화면에 등장하는 공습으로 불타버린 토쿄의 폐허는 '커다란 전쟁'에 휘말린 민중이 체험한 비참함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며, 그저 선량할 따름인 시미즈는 어디까지나 등장하지 않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결말 부분에서 내가 흘린 거의 티슈 스무 장에 해당하는 양의 눈물과는 무관하게, 이 영화 또한 전쟁과 직면하고 있지 않다. 주연배우인 나카이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이 영화의 의미는 '반전과 가족애'에 있는 것이고, 이 주제는 '스물 네 개의 눈동자'와 거의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전개물에 등장하는 평소에는 선량한 일본인 병사가 피점령지인들을 보면서 간혹 표출하곤 하는 휴머니즘 비슷한 감정이 이 영화의 반전을 뒷받침하는 정서와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확실히 시미즈처럼 선량하고 겁 많은 사람들은 평화와 반전을 사랑하지만, 전세계에서 파시즘과 '침략' 전쟁을 그 신체로 수행한 사람들 또한 대체로는 선량하고 겁 많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나 또한 겁쟁이다. 토미야마 이치로의 『폭력의 예감』 서장에 등장하는 "너희들도 자칫 (조선인으로) 오인되어 살해당하는 일이 없도록"이라는 오키나와인 교사의 말은 그렇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폭력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그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만, 나 또한 언어로서 '그들'을 끝까지 속여내야만 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도 폭력의 예감이 찾아오는 순간은 몇 번이나 존재한다. 수인인 누군가는 형이 집행되고, 시미즈와 하룻밤동안 같은 방을 쓰던 오니시도 그렇게 해서 형장으로 끌려간다. 그럴 때마다 수인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올지도 모르는 죽음을 예감하며 몸을 떨지만, 평소 그들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것은 수용소를 감독하는 미군과의 반쯤 장난스러운 대화도 포함한 자잘한 일상이다. 하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더 전에 시미즈는 홀로 괴롭힘을 당하는 타키다 옆에서, 그야말로 말을 함으로써 폭력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뛰어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한순간의 행동이 어쩌면 시미즈를 이 같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든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태어난다면 조개가 되고 싶다는 시미즈의 마지막 말은 무척이나 서글프다. 만일 그가 좀 더 겁이 많고 좀 더 이기적이었다면 그는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파시즘은 고사하고, 조그마한 폭력에 저항하는 것도 어려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내용이 유서의 문면을 제외하고는 순전히 픽션이라는 사실-실제 B, C급 전범들 중에서 사형 집행을 당한 이는 없다고 한다-을 생각하면, 이 시점에서 왜 이 이야기가 다시 영화화되는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by loki | 2009/08/17 11:52 | 두서없는 잡담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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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스파게튕 at 2009/08/17 19:33
이 영화보다 더 최근에 개봉한 전쟁 영화는 타마키 히로시가 주연한 오리온 뭐시기...;; 인데 이 감독이 주로 전쟁영화만 찍은 사람이더라구요.

이 영화 참 복잡하고 기분도 복잡하게 만들었었는데, 주연을 한 나카이군이 전쟁(태평양 전쟁 포함해서)에 대한 의견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라(의외로 오른쪽에 쏠리지 않고 제대로 된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놀랬던;) 우익영화라고 평하고 말 수는 없을 것 같더라구요....

껄끄럽고 서글픈 생각이 드는 건, 일본에 있는 동안은 계속되겠지요? 한국에 가면 교과서 어쩌니 하는 기사로만 접할텐데 그냥 여기 있으니까 더 기분이 복잡해지더라구요. 전쟁과 그 상황에 대해 근본적인 이야기는 쏙 빼 놓는 다는 점, 독일에선 어떤지 궁금해지더라구요.

도쿄엔 안 오세요?^^
Commented by loki at 2009/08/22 22:28
아, 최근에 또 전쟁영화가 있었군요. 그것도 기회가 되면 빌려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나카이군 영화하면서 살을 많이 빼서 깜짝 놀랐어요.
토쿄에는 월말쯤에 있을 것 같아요. ^_^
Commented at 2009/08/22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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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08/28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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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09/0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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